리브랜딩 제안서의 대부분은 로고와 컬러, 서체에서 시작해 거기서 끝납니다. 그런데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리브랜딩 사례를 뜯어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뀐 것은 로고만이 아니라 팔리는 제품과 유통, 그리고 그 일을 실행하는 조직이었습니다. 로고와 비주얼의 변화는 그보다 더 큰 변화의 일부였습니다.
리복은 로고가 아니라 신발 한 켤레로 돌아왔습니다
리복의 국내 리런칭에서 가장 분명하게 성과가 드러난 지점은 BI가 아니라 제품이었습니다. 1985년 테니스 코트화로 탄생한 '클럽C 85'를 시그니처로 내세워 2022년 10월 LF가 국내에 재출시했고, 두 달 만에 초판 물량이 완판됐습니다. 누적 판매량은 15만 켤레를 넘었습니다.
성과를 더 정확히 보여주는 숫자는 따로 있습니다. 클럽C 85 구매자 가운데 10~30대가 약 70%를 차지했습니다. 리브랜딩의 목적 중 하나가 새로운 고객층을 만드는 것이었다면, 이 지표가 성공 여부를 더 직접적으로 검증합니다. 로고를 어떻게 평가했는지가 아니라, 누가 실제로 제품을 선택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후는 확장이었습니다. 리복은 클럽C 라인업을 넓히고 테니스 의류와 바람막이로 품목을 확장했으며, 자운드, 다임, 강혁 같은 브랜드와 협업했습니다. 클럽C LTD, 클럽C 그라운드 UK, 클럽C 엑스트라처럼 파생 라인도 이어졌습니다. 하나가 증명되자 그 위에 쌓아 올린 순서입니다.
제품이 없으면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머렐도 비슷한 방식입니다. 최근 머렐의 리브랜딩 성과를 다룬 기사에서 근거로 제시된 것도 새로운 아이덴티티가 아니라 '모압3'와 '헛목2 레져'라는 두 개의 슈즈였습니다.
제품 중심 브랜드에서 리브랜딩이 성공했는지를 무엇으로 판단할 것인가. 인지도나 SNS 반응만으로는 소비자가 새로운 브랜드 정체성을 실제로 받아들였는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제품의 판매 반응은 소비자가 그 변화를 실제 선택으로 연결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새 정체성을 증명할 제품을 정하지 않은 리브랜딩은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기 어려워집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설명할 수 있어도, 그 변화가 시장에서 실제로 통했는지를 확인할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품은 리브랜딩의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가장 직접적인 검증 수단입니다.
이니스프리의 리브랜딩 팀에는 상품개발과 이커머스가 있었습니다
조직 구성이 결과를 결정합니다.
이니스프리가 리브랜딩 태스크포스를 꾸렸을 때 인원은 약 20명이었는데, 브랜딩·마케팅 직군만으로 채우지 않았습니다. 글로벌 영업, 국내 이커머스, 상품개발 담당자가 함께 들어갔습니다. 각 부서에서 변화에 적극적인 인력을 모았고, 브랜드의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바꿀지 함께 논의했습니다.
리브랜딩을 브랜딩 부서 안에서만 진행하면 그 부서가 직접 바꿀 수 있는 것 중심으로 프로젝트가 흘러가기 쉽습니다. 로고, 컬러, 서체, 톤앤매너, 캠페인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품 구성을 바꾸려면 상품개발이 필요하고, 판매 방식을 바꾸려면 영업과 이커머스가 필요합니다. 유통 채널을 바꾸려면 해당 영역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까지 프로젝트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로고만 바뀌는 리브랜딩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구성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로고 외의 것을 바꿀 사람이 프로젝트에 없다면, 결과물이 로고와 비주얼로 수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시몬스 역시 2015년 이후 브랜드 커뮤니케이션과 유통을 함께 바꾸며 프리미엄 브랜드로의 전환을 추진했습니다. 제품의 기능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브랜드 경험 전체를 바꾸기 어렵다고 보고, 소비자가 브랜드를 접하는 방식 자체를 다시 설계한 것입니다.
리브랜딩 전에 확인해야 할 네 가지
제품 중심 브랜드라면 최소한 네 가지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새 정체성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성공을 판정할 지표가 정해져 있는가
제품과 채널을 바꿀 권한이 프로젝트 안에 있는가
바뀐 다음에 쌓을 것이 준비돼 있는가
첫째, 새 정체성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제품이 중심인 브랜드라면 달라진 브랜드를 대표할 제품이 필요합니다. 이 답이 없다면 실제로 필요한 것이 리브랜딩인지, 디자인 리뉴얼인지부터 다시 구분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고와 컬러, 패키지, 디자인 시스템을 현대화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모든 것을 리브랜딩이라는 이름으로 묶을 필요는 없습니다.
둘째, 성공을 판정할 지표가 정해져 있는가. 리복의 10~30대 구매 비중처럼 고객층이 실제로 달라졌는지를 볼 수도 있고, 특정 제품의 판매 반응이나 신규 고객 유입, 채널별 성과를 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프로젝트가 끝난 뒤 적당한 숫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기 전에 무엇을 성공으로 볼 것인지 정하는 것입니다.
셋째, 제품과 채널을 바꿀 권한이 프로젝트 안에 있는가. 제품을 바꿀 수 있는가. 유통 채널을 바꿀 수 있는가. 아니면 커뮤니케이션만 바꿀 수 있는가. 프로젝트가 실제로 손댈 수 있는 범위를 처음부터 명확히 해야 합니다. 바꿀 권한이 없는 영역까지 리브랜딩의 목표에 포함하면 전략과 실행 사이에 간극이 생깁니다.
넷째, 바뀐 다음에 쌓을 것이 준비돼 있는가. 리복은 클럽C가 반응을 얻은 뒤 라인업과 협업을 확장했습니다. 하나의 제품에서 시작한 변화가 다음 제품과 콘텐츠로 이어진 것입니다. 첫 제품 하나, 첫 캠페인 하나로 끝난다면 브랜드 전체의 변화로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리브랜딩은 한 번의 발표보다 그 이후 무엇을 반복해서 쌓느냐에 더 가깝습니다.
BGROW가 리브랜딩 문의를 받으면 먼저 묻는 것
우리는 리브랜딩 문의를 받으면 로고 이야기를 가장 마지막에 합니다. 먼저 묻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무엇으로 측정할 것인가. 무엇까지 바꿀 수 있는가.
이 세 가지에 대한 답이 없다면 실제로 필요한 것이 리브랜딩인지 디자인 리뉴얼인지부터 다시 구분합니다. 필요한 것이 오래된 로고와 디자인 시스템을 현대화하는 일이라면 디자인 리뉴얼만으로 충분할 수 있습니다. 그 편이 브랜드 입장에서도 범위와 비용을 훨씬 명확하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고객층, 제품, 유통, 브랜드 포지션까지 달라져야 한다면 새로운 로고 하나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프로젝트의 이름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바꿀 것인지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입니다.
로고는 고객에게 가장 빨리 보이는 변화입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보인다고 해서 가장 먼저 결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품이 그대로고, 판매하는 장소가 그대로고, 브랜드가 고객에게 하는 말과 행동도 그대로라면 새로운 로고가 만들어내는 변화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바뀐 것이 없는데 로고만 바뀌면, 고객은 브랜드가 달라졌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냥 로고가 바뀌었다고 느낍니다. 리브랜딩의 본질은 표면이 아니라 구조에 있습니다. BGROW는 그 구조부터 설계합니다.
